누군가의 지적 영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뀐다. 노정태의 경우에 그의 지적 영웅은 진중권이었지만, 나의 지적 영웅은 다치바나 다카시였다. 노정태는 「에레베스트에 대하여」에서 진중권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의 경우는 이원석의 『서평 쓰는 법』을 읽고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이번 작별은 다소 늦은 감이 들지만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의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에 번역된 책이 이미 여럿이다. 그는 성장기에 픽션(fiction)만을 게걸스럽게 읽어치우다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논픽션(nonfiction)만을 읽는 삶을 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읽기 때문에 천정환에 의해 문자문화에 포섭된 모더니스트로서 표현되는 지적 거인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 엄청난 독서량 때문에 주로 글을 읽고 쓰는 주제로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애서가, 장서가로서 뿐만 아니라 서평가로서도 서평에 대한 의견도 남겼다.

정보의 중심은 그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읽을 가치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가능한 한 요약과 인용을 통해 책 자체로 말하는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인 비평적 코멘트(다른 사람의 서평에서 내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부분)는 될 수 있는 한 비중을 줄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서평을 쓸 떄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의 몇 배나 되는 노력을, 소개하려는 책을 고르고 요약하고 인용하는 과정에 쏟아 부었다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p. 216.).

요컨대, 다치바나 다카시는 서평을 쓸 때 비평적 코멘트는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서평의 목적을 해당 책의 가치를 분별해 전달하는데 두는 것이다. 반면, 이원석은 다치바나 다카시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비평적 코멘트가 “없다면, 그 글은 더 이상 서평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그러한 글은 단지 “책 소개”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다시 말하면, 책에 대한 요약과 인용으로 구성된 정보 덩어리는 책 소개일 뿐 서평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서평은 무엇인가? 이원석에게 서평이란 “자신의 기준과 안목을 세우”고 내적 논리를 통해 객관성을 담보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리에서” 깊이 읽기 과정에서 써내려가는 것이다. 저자가 서평의 주된 예로서 드는 몇 가지 서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건축 없는 국가』의 저자인 이종건이다.

이 책의 제언은 간결하다. 지식인의 역할은 세속적인 건축가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라타니 고진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가 부여하는 ‘세속적’이라는 형용사와 ‘건축’이라는 명사의 뜻을 바로 새기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종건, 「[이론과 비평] 세속적인 건축가를 위하여 -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을 읽고」, 『월간 건축문화』 1999년 11월호(월간 건축문화사, 1999), p. 139. 이원석, p. 113에서 재인용.).

이종건은 건축비평가이다.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그의 시선은 다름아닌 건축비평가로서의 시선이며, 그에 따라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읽는 해석의 결은 물론 목적까지 정의된다. 결국 이원석이 말하는 서평의 본질은 분명하다. 그것은 다른 것에 앞서 “평가”이며, 무엇보다 독자이자 저자로서의 고유한 지적 세계를 전제한 활동이다. 따라서, 같은 책이라고 해도 서평자의 지적 역사나 역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서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서평은 독후감과도 다르다. 이원석의 기준에서 독후감의 목적은 내밀한 독서를 통한 정서적 치유에 있지만, 서평은 그 자체가 사회적 행위로서 독자에게 특정 책을 읽도록 설득하거나, 읽지 않도록 권유하는 사회적 서비스에 해당한다. 사회적 서비스라는 것은, 결국 서평이 작성되어 읽히는 과정에서 참여하는 독자와 저자는 반드시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겪고, 이는 공리적 관점에서도 때로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서평은 사회적 서비스로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장려되어야 하는 활동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서평 쓰는 법』의 머리말에서 볼 수 있듯, 무엇보다 서평은 책을 많이 읽기보다 깊이 읽기 위해 쓰는 것이며 저자는 책을 깊이 읽는 최고의 방법으로 ‘서평 쓰기’를 추천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추천에 저격당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책을 깊이 읽고 싶기 때문이다.

서평에 대응하는 가장 일반적인 영단어는 book review이다. New York Times Books Section에서도 서평을 일컫는 단어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책 소개’와 ‘서평’이라는 두 단어의 의미차를 밝히기 위해서는 다른 단어가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책에 대한 정보 덩어리와 구분되는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거친 서평은 풀자면 책 비평(book criticism)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외부에서 말하자면, 이원석이 강조하는만큼 서평의 의미나 가치는 일반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상 독후감, 책 소개, 서평, 책 리뷰라는 단어들의 경계는 모호하게 받아들여진다. 2008년 교수신문의 기획 기사인 ‘지금 서평은 수준 미달’ … 知的 지형도 그려내야에서 볼 수 있듯, 서평은 다른 비평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관계 역학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그 가치도 이에 따라 의심되기도 한다. 글쎄, 어떨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서평 쓰는 법』의 존재에 따른 결과로 이 서평을 썼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