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5일, 픽스웨이브 - Pixwave에서 마련한 이상준(Sang Jun Lee)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실사 영화(live action)와 애니메이션을 두루 거친 경력을 가진 컨셉 아티스트이자 애니메이터인 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와 작업 프로세스,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들을 위한 조언을 공유했다.

난 프로그래머가 되기 전에 미국 칼리지에서 드로잉과 페인팅 수업을 들어둔 적이 있어서, 누드 크로키(croquis)로 점철된 그의 미국 유학 생활은 전반적으로 꽤 친숙하게 들렸다. 오히려 그 중 흥미로운 부분은 그 누드 크로키 자체가 그의 첫 미술과의 대면이었고, 그 어색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점이다.

누드 크로키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는데, 누드 크로키는 개인에게 성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는 나체가 미적 조형물로 인지되는 최초의 순간인 경우가 많다. 나체와의 어색한 첫 대면 끝에 이상준은 자신의 그림을 가족에게 보여주는데, 웃음을 터뜨린 가족에게서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맛본다.

“내가 무언가를 한 것이 다른 이에게 저런(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일으킬 수 있구나.”

이 부분은 김동조의 다음과 같은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이유 없는 편애는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랑 받는 자에게 힘이 된다. 꼭 나를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런 사람이 된다.”

정확히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매우 사소해 보이는 그 경험이 이상준의 다음 생을 결정한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 재료(traditional medium)인 종이 위의 크로키와 페인팅만으로 ILM에 입사하게 된 경위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이상준이 AAC(Academy of Art College; AAU의 전신) 재학 시 작품으로 보여준 드로잉만으로 그 형태나 동세를 잡는 능력은 이미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 이상준은 최근 아티스트로서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전과 달리 회사에서는 가능성만큼 현재 당장 쓸 수 있는 인재를 원하게 된 현실을 환기해준다.

이상준이 실사 영화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경력 없이 바로 애니메이션 업계로 건너뛰게 된 일화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실사 영화 아티스트들이 강조하는 원칙들이 애니메이터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그런 원칙들이 몸에 익은 이상준이 희소한 인재로 남는 장면이 재밌다. 예컨대, 뼈의 튀어나온 지점들을 랜드마크(landmark)로 삼아 단단한 형태를 추구하는 실사 영화 아티스트들의 지식 내지 노하우가 애니메이터들에게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 업계 사이에 어떤 지식/노하우의 단절이 있다.
  2. 그리고 이 지식/노하우의 단절은 업계 인재의 교류가 적거나 없는 탓에 전파되지 않는다.
  3. 그러나 해당 지식/노하우는 시각적 환영을 만드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 업계 둘 모두에 유효하게 적용된다.

이건 단순히 개인이 다른 업종에 뛰어들어 몸값을 올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위 산업 간의 단절로 인해 끊어진 지식/노하우와 공유되거나 전파될 경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준의 세미나에서 시각적인 환영을 창조하는 관점에서 도움이 될 법한 지점은 다음 세 가지였는데

  1. 랜드마크(landmark)
  2. 오브래핑(overlapping)
  3. 해부학(anatomy)

이다. 랜드마크는 사실 해부학과 약간 겹치긴 하는데, 살가죽은 껍데기일 뿐이지 그 내면의 뼈와 같이 돌출된 지점을 중심으로 캐릭터의 구조를 잡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버래핑은 크리스 솔라스키의 저서에서 언급되듯 T 법칙으로 알려진 것으로, 선과 선이 만나면서 공간감을 창출해 “앞면을 그리면서 마치 뒷면을 그리는 듯한” 환영을 만드는 기법이다. 마지막으로 해부학은 기본 중의 기본이면서 끝없이 이해도를 높여나가야 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해당 세미나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질의문답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할애된 탓에 이상준의 시연를 제대로 볼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시연자가 어떤 스토리를 중심으로 캐릭터의 컨셉을 잡아나가야 할 지 어려워하면서 촉박한 시연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렸다. 이후에는 시연 주제 내지 스토리가 미리 마련되어 구체적인 작업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데, 업계 실무자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내고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을 공유하는 지점은 언제나 유익하다. 특히 그것이 자신을 가장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 때 더욱 그렇다. 앞으로도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시점과 장소가 여기, 그리고 어제 뿐만이 아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