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집을 구해 첫 출근을 이틀 앞두고, 몇 가지 생각한 것들이 있어 여기 기록한다. 생각한 것들은 기존에 비해 앞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들이다. 이는 조건의 변화원칙의 변화로 구분할 수 있다.

조건의 변화

주거와 업무 영역의 인접성 대폭 증가

나는 한국에서는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주거와 업무 영역이 점차 더 멀어지는 삶을 살았다. 통근 시간 3-4시간은 기본이었고, 판교로 출퇴근을 하면서 통근 시간은 5-6시간에 육박했다. 분당구에 전세를 얻는 것은 물론 추가 워크스테이션을 구매할 여력도 없었기에 출시 직후 오른쪽 무릎에 통증을 느껴 병원까지 갔다. 정신적으로 긴 통근 시간에 이제 너무 지쳤다. 그래서 베를린에서는 회사까지 5분 거리에 집을 구했다. 이러면 통근 시간은 최대 6시간에서 10분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기존의 36분의 1 수준). 이는 곧 나의 가처분 비노동시간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는 말이다.

English Required, German Recommended

영어는 이제 나의 제1언어로의 격상되었다. 나는 모든 업무는 물론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도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기존의 경우, 영어는 나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제2언어였다. 그러나 이제 영어의 중요성이 더 증대된다. 특히, 같은 엔지니어가 아닌 게임 디자이너와의 영어로의 의사 소통은—최종 면접 과정에서 이미 경험했다시피—훨씬 까다롭고 미묘하다. 자칫 팀원간의 영어 소통이 팀 생산성의 병목이 될 수도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독일어는 제2언어로의 내 삶의 전면에 등장한다. 내가 학부 시절에 몇 번이나 배우려고 시도했다 번번이 학습에 실패한 독일어와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도 소매점에서 구입한 제품의 독일어 설명서를 Google Translate로 해독해가며 고생 중이다. 학업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평균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독일어를 빠르게 배울 수 없는 환경이다. 어떻게든 요령과 고생을 사서 해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원칙의 변화

Remember, No Koreans

한국인과의 만남은 최소화한다. 나는 과거 미국 유학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해외에서의 한국인과의 접촉은 기피하는 편이다. 물론 여태까지 내가 도움을 받은 고마운 분들이 계시지만, 나는 게임 개발에 한정해 거기서 다리 하나 건너서 만나는 소수의 한국인들 외에 다른 채널을 구축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엔지니어 커뮤니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 엔지니어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이 해악이 된다. 나는 나대로 값비싼 기회비용을 치르는 것이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도 이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채널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니까.

빼앗기는 자에서 빼앗는 자가 되기

이직 직전까지 나는 수세에 몰려있었다. 정말 이 정도로 바닥을 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물론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울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이직하기 위해서 역시 적지 않은 것들을 포기했다. 겨우 버티기만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내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내가 대단한 회사에 들어와서도 아니다. 내가 그런 태도로는 이 곳에서 최고의 것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더 공격적이고, 더 지능적으로, 더 집요하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취할 것이다. 그것은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상대의 호감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나는 비전공자예요’, ‘나는 아직 실력이 부족해요’ 등의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겠다.

마무리

원칙에 대해 더 논하자면, 기존의 원칙을 최적화하거나 강화해 지켜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취미를 최소화하기 등의 원칙 말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원칙에 비해 달라지는 점이 아니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또한, 통근 시간의 감소를 통해 규칙적인 운동 시간을 할애하는 등의 계획이 있지만, 이는 크게 보면 빼앗기는 자에서 빼앗는 자가 되기 원칙에 포함할 수 있으므로 자잘한 원칙들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서 생략하도록 한다.

내가 세운 두 원칙들은 각각 두 가지의 대비되는 방향성을 전제한다. Remember, No Koreans는 나와 언어적, 문화적 동일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빼앗기는 자에서 빼앗는 자가 되기는 기존의 수동적이고 절망적으로 손을 벌리는 사람에서, 적극적으로 팀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는데 투자하겠다는 뜻이다. 생존에 급급한 사람이 상위 단계의 가치를 생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겠다.

<끝>